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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날의 도시 신용목의 앞선 두 권의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와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서 신용목은 그가 관찰하는 세상을 시간과 공간의 퇴적물로 형상화하고, 그 퇴적층을 통과하는 바람의 결을 말함으로써 퇴적층의 탁본을 떠내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 『아무 날의 도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퇴적되지 않은, 아니 모든 오래된 퇴적층이 허물어진 도시의 허무와 “허방”(「목련꽃 지는 골목」)이다. 이 도시에서 시인은 실패한 “반란”(「敵國의 가을」)의 결과 “포로”(「포로들의 도시」)로서 살아가는 존재다. (신형철, 「적국에서 보낸 한철-‘포로’로서의 시인에 대하여」)이 도시는 시간도, 공간도, 어느 것도 명명되지 않은 “아무 날의 도시”(「아무 날의 도시」)이며 그렇기에 여기로부터..
의안대군 이화 조선 초에 의안대군이라는 군호를 받은 이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태조와 신덕왕후 사이에 태어난, 그들 부부의 둘째 아들 이방석이며, 다른 하나는 태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이화입니다. 물론 한자가 다르며, 후자는 의롭다는 의(義) 자이고, 전자는 당연하다는 의(宜)자 입니다.조선 개국 당시 이성계의 직계 조상이었던 전주 이씨들은 고조부까지 왕으로 추존되었는데 우리가 고교 시절 목익도환태태로 외우기도 했죠(뒤의 태태는 태조와 태종). 목조, 익조, 도조(탁조), 환조인데 그 이름(휘)들은 각각 이안사, 이행리, 이춘, 이자춘입니다.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인데, 그는 세 처첩을 두었습니다. 후궁(으로 나중에 간주되는) 이씨에게서 원계, 천계 등이 태어났고, 영흥 최씨에게서 1녀 1남을 보았는데 이분이 이..
언어로 세운 집 “글이 너무 많아서 못 읽겠어요” 긴 글만 보면 숨이 가빠오고 쓰러질 거 같다는 사람들. 짧은 글을 선호하는 그들에게 시를 내밀면 또 다시 탄식 섞인 목소리를 쏟아낸다. 느낌이 좋긴 한데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단다. 모호한 걸 피하려 드는 사람들의 기질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양성된 것이기도 하다. 삶에 항상 정답이 있는 건 아니건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린 입장을 명확히 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 정점에는 잔인한 질문이라 할 수 있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가 있다. 특정 입장을 취했다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얼버무렸다가는 ‘회색분자’ 소리를 듣기에 딱이다. 학창시절 나의 미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험 점수를 좌지우지했던 것 또한 정답이다. 수긍할 수 없다면 일단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