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의 앞선 두 권의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와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에서 신용목은 그가 관찰하는 세상을 시간과 공간의 퇴적물로 형상화하고, 그 퇴적층을 통과하는 바람의 결을 말함으로써 퇴적층의 탁본을 떠내는 시인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시집 『아무 날의 도시』에서 시인이 말하는 것은 오히려 아무것도 퇴적되지 않은, 아니 모든 오래된 퇴적층이 허물어진 도시의 허무와 “허방”(「목련꽃 지는 골목」)이다. 이 도시에서 시인은 실패한 “반란”(「敵國의 가을」)의 결과 “포로”(「포로들의 도시」)로서 살아가는 존재다. (신형철, 「적국에서 보낸 한철-‘포로’로서의 시인에 대하여」)이 도시는 시간도, 공간도, 어느 것도 명명되지 않은 “아무 날의 도시”(「아무 날의 도시」)이며 그렇기에 여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또한 이 “아무 날의 도시”는 시인에게 “배고픔”과 “절망”의 공간이다. 그러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나는 격발되지 않았다 어느 것도 나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나는 폭발하지 않았다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달아나는 풍선 나의 방향엔 전방이 없다 멀어지는 후방이 있을 뿐 아무 구석에 쓰러져 한때 몸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한때 화약이었던 것들을 바라본다 봄의 전방엔 방향이 없다 다가오는 허방이 있을 뿐 어느 것도 봄의 관자놀이를 때리지 않았으므로 봄이 볕의 풍선을 뒤집어쓰고 달려가고 있다 살찐 표적들이 웃고 있다 - 신용목, 「격발된 봄」 「격발된 봄」에서 “나”의 존재는 “아무 날의 도시”를 벗어나고자 하는 격발이 실패한 화약 같은 것이다. 그래서 관자놀이가 아니라 꽁무니에 바람 구멍을 달고, 밀어내는 바람의 힘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풍선처럼 달아난다. 풍선은 후방을 밀어내면서 나아갈 뿐, 전방을 향할 줄 모른다. 마찬가지로 다다르고자 했던 봄은 방향을 상실하고 허방에 빠지고 말 것이다. 볕이라는 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계절로서 봄은 달려간다. 이러한 ‘껍데기’의 허무는 다음 시에서 반복된다. 빵 봉지 날리는 골목을 지나왔다 누가 알맹이만 먹고 버렸을까 알맹이를 담고, 껍질이 된 누구 봉지를 찢고 빵을 먹었다, 내 몸 빵 봉지가 되어 환하도록 골목을 쓸려다녔다(목련나무 빈 둥치에 걸려 넘어지다 재개발 담장 붉은 글씨에 찔려 뒤집히다) 빵빵하게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몸 어딘가 쭉 찢어져 아이가 발로 차고 지나갔다 쥐가 뒤집어쓰고 달아났다 누가 봄을 여기다 찢어버렸다 먼지 바닥에 하얗게 쏟아져 걸음걸음 구르는,누가 봄을 다 먹어치웠다 먹어치워, 봄의 껍데기가 되었다봉지가 되었다 바람이 나의 봉지였다 바람은, 몸 어딘가 툭 터져 있는 허공 빵 봉지 날리는 골목을 지나왔다 - 신용목, 「목련꽃 지는 골목」 시에서 골목에 지는 목련꽃은 껍데기만 남은 봄을 상징하는 존재가 되고, 알맹이를 잃은 빵 봉지가 된다. 봉지의 “몸 어딘가 쭉 찢어져”, “몸 어딘가 툭 터져 있는” 부분은 「격발된 봄」에서 풍선의 바람 구멍을 떠올리게 한다. 방향을 상실하고 풍선을 뒤집어쓴 채 달려가는 봄과, 알맹이를 잃어버린 채 골목을 아무렇게나 쓸려다니는 봄은 모두 껍데기의 봄이다. 그리고 알맹이(빵)를 먹어치운 존재는 그 역시 알맹이가 되지 못하고 알맹이를 담고 있는 껍질이 되어 골목을 쓸려다닌다. 그런 ‘나’를 담고 골목을 굴러다니는 바람은 ‘나’의 봉지이다. 여기에는 시간과 공간, 말의 퇴적층 대신에 껍데기의 껍데기의 껍데기가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 도시는 시인의 지옥이다. 시인이 원하는 나라를 찾으려는 반란은 실패했고, 포로로 묶인 시인은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의 잘려나간 다리처럼 누워”(「오지의 비유」) 있는 존재다. 그러나 또다른 시에서 시인은 “신은 지옥에서 가장 잘 보인다// 지옥의 거울이 가장 맑다”(「만약의 생」)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지옥에 지각했다. (그래, 천국에 美가 있을 리가!)// 한 무더기 깨진 불빛으로 반짝이는 도시에서, 나는 겨우 한 줌의 폐허를 꺾어 왔다.”라는 시인의 산문처럼 시인이 도시에서 꺾어온 폐허는 시인의 구원이자 성찰이며 아름다움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퇴적을 잃어버린 폐허의 도시에서, 바람이 더 이상 퇴적층의 탁본이 아니라 껍데기가 되는 지옥에서, 시인은 새로운 시를 내놓았다. 그의 새 산문집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를 기대해본다.
아무 날 떨어져버린 황량하고 적막한 시공간 속에서의 시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이전의 시집들에서 보았던 농경문화의 아른거리는 혹은 퇴적되어 버린 시어들을 탐사하던 시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가득 차 있다. 시인 특유의 이미지를 적재하고 묘사로 압축하는 면모들이 이제는 도시적인 것들과 정면대결 속에서 단련되는 이미지들을 다룬다. 여전히 타자에 대한 넘치는 사랑이 시어들 속에 숨어있지만 시인은 시대의 상실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으며 줄곧 고통스러워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삶의 고통을 들춰내는 순간, 우리는 덜 고통스럽고 덜 비겁해지는 화자가 된다.
서정적인 것 이 사회적인 것 과 어디에서 어떻게 어디까지 만나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시집을 거론하게 될 것이다. 그 어느 곳에나, 어느 날에 위치하고 있을 비인간적인 도시의 유산이 시인의 눈에 폐허 다. 하지만 이 폐허를 지켜보는 일을 시인이 게을리 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얼굴에 어둠을 묻힌 채 뒷걸음질 로만 앞을 갈 수 있는 맹인 시인은 무엇을 바라보는 것일까. 결국 아무 날의 도시 속에서 시인은 견딤 의 에너지로 희망 과 사랑 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시집 속에서 많은 독자들이 그 메시지 혹은 그 이상의 것들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격발된 봄
격발된 봄
위험한 書誌
목련꽃 지는 골목
탱크로리
칼끝에 혀끝을 대보는 순간
敵國의 가을
웃을 수도 울 수도 있지만
얼음의 각주
그것을 후회하기 위하여
슬픔의 뿔
오 초의 기술
敵國의 봄
무지개 훌라후프
개구리 증후군
하지만 이해해
죽은 자의 노래로부터
그 숲의 비밀
무지개 훌라후프
가꿔진 어둠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그것을 말할 때
노아의 여름
복제된 풍경화
폭우 지난
바퀴 자국
물의 도감
꽃들의 작전명
삐라의 나라
맹아이며 농아인
만약의 생
만약의 생
우주의 저수지
타자의 시간
꿈 밖에서 잠들다
오지의 비유
얼굴의 고고학
장미
리코더
아무 날의 도시
투명한 순간
공터의 달리기
우리가 헤어질 때
터지는 노래들
내 얼굴은 간신히 매달려 있다
포로들의 도시
우리는 이렇게 살겠지
어떤 혁명의 시작
미끄럼틀
꽃들의 귀가
어느 날 밤이 왔다
다른 곳으로 꿈꾸러 간다
우리가 잊혀질 때
소·沼
너머 또 너머
오래된 북
추
일어나지 않는 일 때문에 서해에 갔다
허공에서 감자를 캐다
인디언의 땅
늙은 산들의 마을
신의 생일
0시의 자오선
미끄럼틀
해설 | 적국에서 보낸 한 철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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